들어가며
요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불안을 느낀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고, 내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AI가 쏟아내는 정보의 양은 전례가 없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연결하고 패턴을 발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실제로 온라인 어딘가에서 AI를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글을 반쯤 들뜬 상태로 올리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달리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저거 정신병 아니야?”
그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이런 생각이 스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저렇게 보이는 건 아닐까. 내가 연결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 건 맞는 걸까. 이게 깨달음인지, 착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지.
세상의 작동 원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원래 소수다. 그 소수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줄 사람을 찾기는 더 어렵다. 그래서 이 불안은 더 외롭고, 더 깊어진다.
그런데 이 불안은 사실 내가 세상에 대해 만들어낸 생각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아주 정직한 질문을 품고 있다.
과학이 이 질문에 대해 하나의 힌트를 준다. 실험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실험 결과 자체가 아니다. 실험 방법론을 제대로 지켰는가가 보장한다. 결과의 신뢰성은 결과 바깥의 상위 원리에서 온다. 내 생각이 맞는지를 보장하는 것도, 그 생각의 내용이 아니라 그 생각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아는 데서 온다.
그런데 그 방식을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직관"이라고 부른다.
사실 직관이라는 단어는 무언가를 정확히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에너지, 힘, 분위기, 뜻 — 이런 단어들처럼, 작동 원리를 아직 모르는 것을 뭉뚱그려 부를 때 인간이 만들어내는 언어 중 하나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도, 어떤 선택이 왠지 맞게 느껴지는 것도 — 모두 의식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인데, 그 전체를 설명할 언어가 없으니 “직관"이라는 말로 묶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직관이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무언가를 놓치게 된다.
이 글은 그 뭉뚱그려진 것의 안을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작동 원리를 알면 그것이 할 수 있는 범위를 특정할 수 있고, 범위를 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유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얻을 수 있다. 그 시각이 생기는 순간, 처음의 불안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출발점에 양질변환이라는 개념이 있다. 쌓임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종류 자체가 바뀐다는 원리로, 지금 인간 직관과 AI, 그리고 지식의 본질을 설명하는 여러 시도들이 공통적으로 기대고 있는 구조다.
1. 인간의 직관은 어떻게 작동하길래, 올바른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테렌스 타오는 한 인터뷰에서 케플러의 이야기를 꺼냈다. 케플러의 진짜 도약은 화성 궤도가 타원이라는 수식을 발견한 것이 아니었다. “궤도"를 바라보는 개념 틀 자체가 바뀐 것이었다. 숫자가 먼저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방식이 먼저 달라졌다.
그런데 그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케플러는 그 순간 무슨 일을 한 것인지 —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뇌과학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려 한다. 인간의 뇌는 경험을 그대로 저장하지 않는다. 반복되는 패턴을 추출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수많은 사례가 쌓이면서 뇌는 점점 더 압축된 표현을 만들어낸다. 그 과정이 의식에 기록되는 형태로 남기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AI 연구에서도 비슷한 방향의 제안이 나오고 있다. Transformer 회로를 해석하는 연구에서 등장한 Superposition 가설은, 신경망이 제한된 차원 안에 훨씬 많은 개념을 겹쳐서 저장할 수 있다고 본다. 공간이 부족할수록 개념들은 서로 간섭하면서도 공존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뇌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지만 — 어떤 맥락에서 갑자기 연결이 일어나는 느낌은, 중첩된 표현들이 특정 조건에서 일시적으로 정렬되는 사건과 가까운 것일 수 있다.
Yima 교수의 엡실론 볼(ε-ball) 은 이 압축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실제 세계의 데이터는 고차원 공간 안의 저차원 구조 위에 분포한다. 엡실론 볼은 그 구조를 작은 구들의 집합으로 덮는 방식으로 근사한다. ε이 클 때는 구들이 커서 진짜 분포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ε이 작아질수록 구들이 촘촘해지며 진짜 구조에 점점 더 가깝게 달라붙는다. 중요한 것은, ε이 임계점 이하로 줄어드는 순간 근사의 질 자체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노이즈 제거기가 갑자기 진짜 분포를 올바르게 가리키기 시작한다. Yima 교수는 인간의 직관도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충분한 사례가 쌓여 내부의 해상도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단순히 더 정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자체가 바뀐다.
언어는 다르지만 이 세 관점이 가리키는 방향은 비슷하다.
인간의 직관은 단순히 정보를 더 많이 저장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사례가 쌓이고 패턴이 추출되면서, 어느 임계점에서 단순히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인식이 출현할 수 있다. 양질변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구조가 단지 인간 직관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리학에서 상전이를 설명하기 위해 정교화된 이 개념이, 지금은 AI 연구와 학습 이론, 그리고 지식의 본질을 탐구하는 여러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기대고 있는 구조가 되고 있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방식으로, 쌓임이 어떻게 도약이 되는가, 라는 모두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케플러의 도약도 그랬을 것이다. 수십 년간의 관측 데이터가 쌓이고, 원 궤도와의 오차가 반복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지고, 어느 순간 개념 틀 자체가 바뀌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케플러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고 뭉뚱그려서 부른다.
2. 인간의 직관은 세계의 작동원리에 대해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는가
작동 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직관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흥미로운 역설이 있다. 인류가 발견한 가장 강력한 지식들은 종종 인간의 직관에 반한다. 양자역학은 직관을 배반한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직관을 해체했다. 그런데 그 지식들을 발견한 것도 직관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빛과 함께 달리면 어떻게 보일까"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케플러는 원 궤도와 실제 관측 사이의 오차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직관이 틀린 게 아니었다. 작동하는 레이어가 달랐던 것이다.
1장에서 살펴본 구조로 말하면 이렇다. 인간의 직관은 현재의 개념 체계 안에서 압축된 모델을 제공한다. 그 체계 자체가 바뀌어야 할 때, 직관은 먼저 불편함으로 신호를 보낸다. “뭔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 그것이 새로운 개념 체계로의 도약 직전에 나타나는 임계 신호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만약 인간의 직관이 정답을 직접 알아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직관이 틀렸을 때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오답을 불편하게 느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자기 교정이 가능한 구조다. 더 많은 사례가 쌓일수록 더 정교한 불편함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그 불편함이 다음 도약의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불편함이 구체적으로 어떨 때 오는지를 좀 더 들여다볼 수 있다.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있어야 할 논리가 비어 있을 때다. 설명이 그럴듯하게 흘러가는데, 어딘가 논리의 연결이 끊겨 있다. “그래서 왜?“라는 질문이 계속 떠오르는데 답이 없는 느낌. 또 하나는 설명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양이 많아질 때다. 뭔가를 설명하는 데 이렇게 많은 말이 필요하다면, 아직 핵심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신호일 수 있다. 압축된 이해는 단순하고, 단순하지 않다면 아직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이것들은 내가 어렸을 때 혼자 생각을 이어나가게 했던 지점들이다. 설명에 구멍이 있거나, 너무 복잡해서 의심스러울 때, 그 불편함을 버리지 않고 계속 따라갔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는 그 불편함을 무시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새로운 정보, 새로운 틀, 새로운 이론이 쏟아진다. 불편함을 느끼기도 전에 다음 것이 온다. 현실적인 여유도 없다. 질문을 따라가는 것보다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런데 이 상황 자체가, 사실 임계점을 이미 넘은 상황의 신호일 수 있다. 세계는 바뀌었다. 예전의 개념 틀로는 새로운 정보들을 하나의 구조 안에 담을 수 없게 되었다. 더 상위의 모델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아직 예전 모델이 있다. 정보는 계속 들어오는데, 그것을 담을 틀이 맞지 않으니 불편함이 쌓인다. 그 불편함이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막연한 인지적 과부하의 정체일 수 있다.
임계점은 단순히 개인이 충분한 사례를 쌓았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니다. 시대 자체가 새로운 개념 틀을 요구하는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그것을 아직 만들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불편함은 찾아온다.
정확한 경계를 그을 수는 없지만, 하나는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직관이 세계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정답을 생성하는 능력에 달려 있지 않다. 오답의 신호를 감지하고, 그 신호를 버리지 않는 태도에 달려 있다. 케플러가 원 궤도를 고집하면서 계속 나오는 오차를 이상하게 여긴 것처럼. 볼츠만이 열을 입자의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계속한 것처럼.
범위의 한계는 세계의 복잡성이 아니라, 불편함의 신호를 무시하는 순간 생긴다.
3. 내 직관을 믿을 수 있는가
처음의 불안으로 돌아가면, 온라인에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쓴 사람과 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이 여전히 남는다.
사실 이 질문 자체가 이미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직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사람, 세상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싶은 사람 — 이들은 모두 같은 일을 하고 있다. 수많은 정보를 압축하려 하고 있다. 아직 임계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계속 사례를 쌓고 있는 구도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가진 사람들은 나의 경쟁자가 아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다. 그들이 어디서 불편함을 느끼는지, 어떤 지점에서 연결이 일어났는지를 듣는 것은 단순한 교류가 아니라, 내가 직접 쌓을 수 없는 사례를 얻는 일이다. 불안이 덜어지는 동시에, 더 많은 데이터가 생긴다.
단, 이 질문을 하는 태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은 천재니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못 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의 길 자체가 막힌다.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숭배하게 된다. 그리고 천재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기만 하면, 정보는 취합되지 않고 계속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간다. 임계점은 더 멀어진다.
테렌스 타오는 자신이 모든 것을 hacking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공식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식이 왜 그렇게 되는지를 끝까지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그가 더 많은 것을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타고난 능력 때문이 아니라, 원인을 쫓고 정보를 통합하고 압축하는 활동을 오래 했기 때문이다. 천재들이 더 많은 정보를 다룰 수 있는 것은 용량이 큰 게 아니라, 정보를 더 잘 줄여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인을 찾고, 통합하여 정보를 줄여나가면 — 같은 두뇌로 더 많은 것을 다룰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도약의 구조다.
내 직관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이렇게 바뀐다.
나는 불편함의 신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신호가 쌓일 수 있는 조건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가 — 이것이 결국 남는 질문이다.
결론 — 변화의 법칙을 아는 첫 번째 스텝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생각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이 질문들은 결국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라는 하나로 수렴한다.
양질변환의 구조는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 중 하나다. 변화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쌓임이 먼저고, 도약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그 도약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 — 인간의 직관이 어떻게 사례를 압축하는지, 임계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불편함의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 것 — 이것이 변화의 법칙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향의 첫 번째 스텝이 된다.
머리를 쓰는 시간이 헛되지 않으려면, 직관의 작동 원리를 알아야 한다. 직관을 알려면, 압축이 어떻게 새로운 질을 만드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묻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과정 안에 있다.
믿거나 말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 위에서 다루는 문제다.